무라이 사다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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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이 사다카쓰는 오미국 출신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신임을 얻어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를 역임했다. 1573년 노부나가가 교토를 장악한 후,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 및 사찰과의 교섭, 어소 수복 등 노부나가 지배 하의 교토 행정을 담당했다. 1581년 출가 후, 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타다를 따라 아케치 미쓰히데 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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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이 사다카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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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무라이 씨 |
이름 | 무라이 사다카쓰 |
이명 | 요시베(吉兵衛) |
호 | 춘장헌(春長軒) |
관위 | 나가토노카미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1582년 6월 21일) |
사망지 | 묘카쿠지(妙覚寺) |
묘소 | 쇼린잔 춘장사(교토시 시모교구) |
주군 | 오다 노부나가 |
가족 관계 | |
형제 | 동생: 무네노부(宗信) |
자녀 | 사다나리 , 기요쓰구, 자광원( 사사 나리마사실), 딸 ( 마에다 겐이실), 딸 (후쿠시마 다카하루실), 양자: 시게카쓰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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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무라이 사다카쓰는 오미국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긴 인물이다.[1]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20년경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2]
사다카쓰는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일찍부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556년 오다 노부유키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시마다 히데미쓰와 함께 도다 고젠의 의뢰를 받아 노부유키와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의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3] 아시카가 요시아키 상경 시에는 노부나가와 함께 교토에 남아 여러 정무를 담당했다. 서미노 삼인중 항복 권유 시 인질 인수, 아시카가 요시아키 보호, 니조 고쇼 조영, 사찰과의 교섭 등 오다 가문의 정무를 담당했고, 조잔 니치조와 함께 교토 고쇼 수축도 담당했다.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하고 교토를 완전히 장악한 노부나가는 사다카쓰를 교토쇼시다이(천하소시다이)에 임명했다. 사다카쓰는 마쓰이 유칸, 다케이 세키안, 아케치 미쓰히데, 하나와 나오마사 등과 함께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 귀족, 사찰과의 교섭, 황궁 수리, 사신 접대, 노부나가의 교토 말 행사 준비 등 노부나가의 지배 아래 교토 행정 전반을 책임졌다.[1]
1575년, 노부나가는 재정난을 겪는 조정을 돕기 위해 도쿠세이령을 내려 옛 영지를 돌려주도록 했다. 사다카쓰는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토지와 문서를 조사하고 분쟁을 해결했다.[1] 같은 해 노부나가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제안받았지만 사양하고 가신들에게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이때 사다카쓰는 조정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정6위하·나가토노카미에 임명되었다.[1]
1581년, 사다카쓰는 출가하여 춘장헌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가독(가문의 상속권)을 아들 사다나리에게 물려주었다.[1]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사다카쓰는 혼노지 맞은편 자택에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타다가 머물던 묘카쿠지로 달려갔다.[1] 노부타다에게 니조 신고쇼로 이동할 것을 권유하고, 다른 가신들과 함께 니조 신고쇼에서 아케치군에 맞서 싸웠으나, 노부타다와 함께 전사했다.[1] 그의 아들 사다나리와 기요쓰구도 같은 곳에서 전사했다.[1]
2. 1. 출신
오미국 출신이다.[1] 출생년도는 불확실하지만, 1576년 1월 28일자 노부토키쿄키에 아사히 쇼시치라는 12~3명의 손자가 있다는 기록과 1577년 9월 19일자 프로이스의 기록에서 존경할 만한 노년의 이교도라고 칭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에이쇼 17년(1520년)경이나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2]2. 2. 오다 노부나가 휘하
오미국 출신으로[1], 출생년도는 불확실하지만 에이쇼 17년(1520년)경이나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2]. 행정 능력이 뛰어나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아 일찍부터 중용되었다.고지 2년(1556년) 오다 노부유키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시마다 히데미쓰와 함께 도다 고젠의 의뢰를 받아 노부유키와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의 강화 교섭을 벌였다[3].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상락했을 때 노부나가와 동행하여 묘인 료세이, 사쿠마 노부모리, 기노시타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등과 함께 쿄에 남아 여러 정무를 담당했다.
서미노 삼인중 항복 권유 당시 인질 인수, 아시카가 요시아키 보호, 상락 후 니조 고쇼 조영, 사찰과의 교섭 등 오다 가문의 정무를 담당했다. 조잔 니치조와 함께 교토 고쇼 수축도 담당했다.
2. 3.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덴쇼 원년(1573년) 7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한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를 완전 지배하에 둔 후, 노부나가로부터 교토쇼시다이(천하소시다이)에 임명되었다. 마쓰이 유칸, 다케이 세키안, 아케치 미쓰히데, 하나와 나오마사 등 노부나가의 행정 관료 측근들과 함께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귀족·각 사찰과의 교섭, 어소의 수복, 사자의 접대, 노부나가의 교토 말 맞춤 준비 등, 노부나가 지배 체제 하의 교토에 관한 행정의 모든 것을 맡았다.[1]덴쇼 3년 4월, 노부나가는 곤궁한 공가를 구제하기 위해 공가의 옛 영지를 반환하는 도쿠세이령을 발한다. 사다카쓰는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토지나 문서의 조사 및 분쟁을 담당했다.[1]
같은 해 7월, 노부나가에게 관위 승진의 칙명이 내려졌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굳이 사양하고 대신 가신단에 대한 서임을 청하여 칙허를 받았다. 7월 23일, 사다카쓰는 조정과의 관계도 고려되어 정6위하·나가토노카미에 서임된다.[1]
같은 해 10월 19일, 사다카쓰는 다테 테루무네의 사자를 접대했다.[1]
덴쇼 4년 4월,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사용하던 니조 어소와는 별도로 니조 하루요시의 저택에 새 저택을 짓기로 결정하고, 사다카쓰에게 부역을 명했다. 나중에 이 신저택은 "니조 어신조" "니조 신어소"라고 불렸다.[1]
덴쇼 5년 3월 상순, 어소의 수리가 끝나자 사다카쓰는 교토의 마을 사람들에게 어소의 축지담 수복에 협력하도록 명하고, 인원을 몇 개의 반으로 나누어 작업을 경쟁시켰다. 축지담 위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노래와 춤이 선보여 관람객이 쇄도했고, 주변은 매우 번화했다. 너무나 번화해서 고요제이 천황과 귀족들도 구경했다. 그 번화함 속에서 경쟁하며 진행된 수리 공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한다.[1]
덴쇼 8년 2월 26일, 노부나가는 교토에서의 거주지를 혼노지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사다카쓰에게 부역을 명했다.[1]
덴쇼 9년, 사다카쓰는 출가하여 춘장헌이라 호하고, 가독을 아들인 사다나리에게 물려주었다.[1]
2. 4. 출가와 혼노지의 변
1582년(덴쇼 10년) 5월, 사다카쓰는 조정으로부터 "노부나가를 태정대신, 관백, 정토대장군 중 하나로 임명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달받았는데, 이는 사다카쓰 쪽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삼직 추임 문제 참조).[1]6월 2일, 혼노지의 변에서는 혼노지 맞은편의 자택에 있었지만, 사다카쓰는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의 숙소인 묘카쿠지로 달려갔다.[1] 노부타다에게 니조 신고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고, 마찬가지로 달려온 다른 오다가 가신들과 함께 니조 신고쇼에서 농성하며 아케치 군에 대항해 싸웠지만, 노부타다와 함께 전사했다.[1] 또한, 아들 사다나리, 기요쓰구도 같은 장소에서 전사했다.[1]
3. 인물
루이스 프로이스는 사다카쓰를 "수도의 총독"이라고 칭하며, "존경할 만한 이교도의 노인이자 매우 권세가 있다"라고 평했다.
4. 초상
교토시의 다이운인에는 머리를 깎은 노인의 모습인 사다카쓰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5. 등장 작품
- 미부 이치로 『노부나가의 서자』(2019년~, 기간 4권)
-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 (2002년, NHK 대하드라마, 배역: 가리야 슌스케)
참조
[1]
서적
信長の天下所司代 筆頭吏僚 村井貞勝
中央公論社
2009
[2]
서적
信長の天下所司代 筆頭吏僚 村井貞勝
中央公論社
2009
[3]
서적
信長の天下所司代 筆頭吏僚 村井貞勝
中央公論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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